[12월호] 북한 핵무기와 전쟁 기억 - 전순영 기독교통일지도자학 박사
- 25-12-1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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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무기와 전쟁 기억
전순영 (기독교통일지도자학 박사)
최근 러시아와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북한의 행보가 전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두 강대국 사이를 오가는 북한식 등거리 외교는 오래된 관행이지만,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러우 전쟁이라는 국제적 이슈의 한복판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북한의 위상은 이전과 사뭇 다르게 보인다. 적대적 두 국가론을 표방하면서 일체의 남북대화와 교류협력을 거부하는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핵무기를 앞세운 생존과 지속과 번영의 열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흡수통일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다.
1. 북한사회의 집단기억
오늘날의 북한사회를 형성하는 공식적인 집단기억은 네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박한식·강국진, 2018: 64~65). 첫째는 김일성 주석과 연관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일제강점기의 경험과 항일운동에 대한 기억이다. 북한체제의 뿌리는 동북항일연군 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경험에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은 일제 통치라는 엄혹한 시련에 맞서 싸운 기억에서 발원한 것이다. 둘째는 분단의 기억으로, 북한정권 수립은 친일파 축출과 외세 배격의 필연적인 결과로 간주된다. 남쪽에서는 미군정의 비호 아래 이승만 정부와 친일세력이 득세해 정권을 잡았으나 북쪽에서는 김일성 등 항일혁명가 세력이 소군정의 지원하에 정권을 잡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전쟁의 기억이다. 북한지역에 집중된 공습으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 땅을 지켜냈다는 것이 철저한 민족주의를 고착시켰다. 넷째는 중국과 소련 간 대립의 기억이다. 북한으로서는 중국과 소련 사이에 갈등이 고조될 때 어느 한쪽을 편들 수 없었다. 답은 등거리 외교였다. 북한은 양측을 오가며 지원을 받아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생존능력을 키웠다.
이러한 집단기억 중에서 한국전쟁의 기억은 북한체제의 기형적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북한에서 한국전쟁은 미제국주의와 북한사회주의가 대결해 북한이 승리한,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은 항일투사 김일성의 탁월한 영도력이기 때문에, 향후 미제와의 전쟁이 재발할 경우 승리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혁명적 가계를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정권의 세습논리이다. 북한의 속내를 알려면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어떻게 집단의식을 형성했는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과도하게 자존심을 내세우고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이면에는 엄청나게 벌어진 남북의 국력 격차에 위축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갈수록 수세에 몰리는 북한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2. 핵개발의 원동력이 된 전쟁 기억
북한의 핵개발도 다양한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공포 그 자체였던 미군의 공습을 경험한 북한은 미국의 선제공격과 핵공격에 대한 방어기제로 자체 핵무기를 개발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트라우마를 겪은 북한 사람들은 미군기가 핵무기를 투하할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에 시달렸다.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함흥시 흥남부두에서 미군이 철수할 때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던 피란민들은 미군이 후퇴한 후 원자탄을 떨어뜨린다는 소문 탓에 온통 겁에 질려 있었다. 그들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 육군부는 1951년 9월 중국군이 개입하자, 유사시 북한지역과 중국, 구소련을 핵무기로 공격하는 ‘허드슨 항구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다. 군사적으로 핵무기 사용 옵션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비등했지만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결국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해임되었다. 1964년 10월 중국이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 마오쩌둥은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이다. 미국이나 소련이 우리가 핵보유국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인식도 그와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에 맞서 힘겹게 투쟁했던 김일성으로서는 그토록 강력해 보이던 일본군이 원자탄 두 방에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하게 굴복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씨 일가가 3대째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미국 핵무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 안보 논리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인식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1955년 1월 아서 래드포드 미 합참의장은 서울을 방문해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새로운 침략이든 막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발언했다. 한반도에는 1957년 12월 말부터 1958년 1월까지 약 150개의 핵탄두가 배치되었고 1967년에는 그 숫자가 최고 수준에 달해 약 950개로 늘어났다. 북한은 1961년 구소련과 군사동맹을 체결하면서 핵우산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1990년 구소련이 한국과의 국교 수립을 통보하자, 북한은 ‘조소상호원조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이에 따른 자구수단으로 핵무기 개발과 함께 1985년에 가입했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의도를 밝혔다. 구소련이 제공하던 핵우산이 사라졌으니 자체적으로 핵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남쪽에서는 냉전종식에 따른 미-소 간의 합의로 1991년 전술핵 철수가 이루어지고 한국정부가 1991년 12월 18일 ‘핵 부재 선언’을 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위협이 증가하면서 남한에서 전술핵 재배치 요구가 계속 점화되고 있고, 최근 경주 APEC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면서 북한으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안보의존이 더 심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는 2003년 12월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와 관계 정상화 약속을 받고 핵개발을 포기했다가 내전이 발발하면서 결국 2011년 반군에게 처형되었다. 당시 미국은 반군을 적극 지원했다. 2013년 3월 31일 김정은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압력과 회유에 못 이겨 이미 있던 전쟁 억제력마저 포기했다가 종당에는 침략의 희생물이 되고 만 중동 지역 나라들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섣불리 핵무기를 포기했다가는 카다피처럼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핵이 북한정권의 입장에서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지점에서부터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핵문제는 한국전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경고하는 신호등이다.
<참고문헌>
전순영. 2025. 한반도의 기억. 파주: 한울아카데미.
박한식·강국진. 2018. 선을 넘어 생각한다. 서울: 부키.
※ 본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숭실평화통일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