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동독의 ‘두 국가론’ - 숭실평화통일연구원 박성열 초빙교수
- 24-10-1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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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동독의 ‘두 국가론’
박성열(숭실평화통일연구원 초빙교수)
1. 들어가는 말
남북한은 1948년 분단된 이후 대부분 기간 서로 체제경쟁을 벌이고 갈등하면서도 언젠가는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을 이룰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2023년말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남한에 대해 “교전중인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고 통일과 민족을 지우는 후속 작업을 진행하면서 남북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고 영구 분단 가능성 등 남북 관계가 극히 불투명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런 맥락에서 북한이 제기한 ‘적대적 두 국가론’과 독일 통일(1990.10) 이전 당시 동독이 제기했던 ‘두 국가론’의 내용과 그 배경을 함께 검토함으로써 남북한 관계에 있어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2.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IFES-UNKS 공동포럼, 한반도의 통일담론-과거, 현재, 미래(2024.5.21. 북한대학원대학교), 발표 내용을 주로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1) 제기 동향 및 후속 조치 내용
김정은 위원장은 2023년 12월 26~30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 8기 9차 전원회의 사업총화 보고에서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북과 남의 관계를 보여주는 현주소라고 할수 있습니다.”라고 밝힘으로써 남과 북을 ‘적대적 두 국가, 두 교전국’으로 규정하였다.
뒤이어 김정은은 2024년 1월15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0차 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대한민국은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재차 규정하며, 북한 헌법에 영토조항 신설 및 유사시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여 북한 영토에 편입시키는 문제도 헌법에 반영‘토록 주문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모든 분야에서 후속 조치를 실행하고 있다. 첫째, 최고인민회의는 2024년 10월 7~8일 제14기 11차 회의를 열어 “사회주의 헌법의 일부 내용을 수정보충(개정)”하였다.(노동신문, 2024.10.9.보도).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삭제 여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최고인민회의 종료 다음 날인 10월 9일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가 유엔군사령부에 발송한 보도문(‘남쪽 국경 완전 차단 및 요새화’)을 보면, ‘적대적 두 국가 관계’와 ‘주권행사영역’이 헌법화되었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남쪽 국경 완전 차단 및 요새화’는 적대관계에 있는 남북한 사이에서 북한이 자신의 주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차단·방어막을 행동으로 구축하겠다는 발상으로 볼 수 있다(이기동 외, 북한 최고인민회의 14기 11차 회의 결과와 함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슈브리프 611호, 2014.10.11.). 헌법 개정 여부는 북한 체제 특성상 최고 지도자의 지침을 이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내부적 사정과 대외 전략적 측면의 고려가 작용하여 공개를 미루거나 개정을 연기했을 개연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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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민족·통일과 관련된 대남기구와 법제를 정리하고 있다. 통일전선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폐지를 결정하였고 남한과의 교류협력을 담당하고 통일전선전술에 따라 활용해 오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범민련 북측본부, 6.15북측위, 민족화해협의회, 단군민족통일협의회 등을 해산하였으며 북한은 대남사업을 외교부에서 담당토록 하였고, 남한의 범민련 남측본부 등도 활동 중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 북남경제협력법,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 북남경제협력관련합의서를 폐지키로 하였다.
셋째, “공화국의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및 ‘삼천리금수강산’ ‘8천만 겨레’ 용어를 삭제하고 사용하지 않으며 북 애국가 노랫말 가운데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을 ‘이 세상 아름다운 내 조국’으로 변경하고 평양 지하철역 ‘통일역’→‘역’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등 과거 시대 잔여물을 처리키로 하였다.
넷째, 경의선 단절 등 접경지역 남북 연계 조건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 남한과 연결된 경의선·동해선 도로 지점을 폭파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섯째, 군사적 측면에서 남한에 위협적 공세를 취하고 있다. 비무장지대의 감시초소(GP)를 복원하고 있으며, 천안함 폭침(2010.3.26.) 당시 해군 사령관이었던 정명도를 인민군 총참모부 제1부총참모장 겸 작전국장에 임명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개최(2024.10.7.) 직전에 오진우 포병종합군관학교를 방문하여 제75기 졸업생들의 육지에서 해상으로의 포실탄 사격훈련을 현지 지도하였다 노동신문(2024.10.7.)은 육지에서 해상을 향해 포를 쏘는 모습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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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대적 두 국가론 제기의 배경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론’을 제기한 명분에 대해 역대 남한 정부의 통일정책과 헌법의 영토조항(제3조), 미국과 연계한 전쟁 준비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김정은 정권이 전격적으로 ‘적대적 두 국가론’을 들고 나온 것은 2019년 미국과의 핵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고 내부적으로 경제난, 한류 전파 등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는 시점에서 남북 관계의 판을 뒤엎어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하고 이를 계기로 체제에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며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한의 진보와 보수정권 모두에 대해 기대할 것이 없다는 실망과 함께 남한 사회내 남남갈등을 유발하려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아울러, 근본적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2012년 집권한 김정은 정권은 1980년대말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부터 남한과의 국력 차이가 갈수록 벌어져(남북간 경제력 50:1로 평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경쟁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1민족 1국가 지향의 통일논의는 체제를 약화시킬 뿐이라고 보고 독자적 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전략적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정권은 2012년 출범 이후 민족보다 국가를 강조하고 독자적 정상국가화를 모색하여 왔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 8월 15일 남한과 공유해 온 표준시를 30분 격차가 나는 ‘평양시간’으로 바꿈으로써 남과 북의 ‘시공간’을 분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으며 ‘평양시간’은 2018 년 4 월 27 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폐지되었고, 2018 년 5 월 5 일부터 남과 북의 표준시는 다시 같아졌다.
, 2021년 1월 5-12일 개최된 조선로동당 8차 대회에서는 ‘우리 국가 제일주의’를 선포하여 ‘민족’이 아닌 ‘국가’를 전면에 내세웠다. 2023년 7월 1일 외무성 국장 담화는 대한민국을 ‘외국’으로 간주한다는 정책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이 담화는 금강산 지역에 묻혀 있는 고 정몽헌 현대 회장을 추모하려고 방북을 신청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요청을 불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기존에는 남북기본합의서의 ‘통일지향 특수관계’ 규정에 따라 ‘입국’이 아닌 ‘입경’으로 처리해 왔으며, 남북 상호왕래는 외무성 소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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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 동독의 2국가 2민족론
1) 두 국가론에 대한 당국의 입장 동독의 2국가 2민족론의 전개 과정과 배경(이봉기, 온라인 시리즈 CO-24-39, 통일연구원) 참고,
동독은 1949년 국가 수립 초기 헌법 제1조에서 “독일은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민주공화국이다”, “독일 국적은 단지 하나”라고 규정하였다 독일은 1945년 2차대전 패전후 1949.5.23. 연합국 점령지를 영토로 하여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수도: 본)이 수립되었고 1949.10.7. 소련 점령지를 영토로 하여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수도: 동베를린)이 수립되어 분단되었다.
. 그러나 동독은 1953년 6월 17일 노동자 봉기로 체제 정당성에 위협을 받자 울브리히트 당 중앙위 1서기가 1953년 9월 당중앙위 16차 회의에서 “독일에 사실상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하였고,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1955년 7월 26일 동독을 방문하여 “2차 대전 이후 독일제국의 영토 위에 상이한 정치질서를 가진 두 개의 주권국가가 세워졌다”고 언급하며 두 개 국가이론(Zwei-Staaten-Theorie)을 제시하였다.
1966년 서독 사민당이 최초로 기민당과 대연정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자 동독 사통당(공산당)은 이를 ‘노동자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서독 사민당에 대해 우군이라는 시각을 접게 되며, 이때부터 보다 명확한 두 국가 정책을 요구하고 서독에 대해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동독은 1968년 헌법 개정을 통해 1조에서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국가이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같은 독일 민족으로 동독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서독에는 자본주의 국가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1민족 2국가).
특히 서독에서 1969년 10월 사민당 브란트 총리가 취임하면서 정부 성명을 통해 “비록 독일 영토 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서로 외국은 아니다”라고 하며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국가 승인을 거부한 데 대해 서독이 그동안 주장해왔던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ktrin)에 의한 단독대표권을 폐기하고 ‘사실상’ 1민족 2국가를 인정하면서도 미래 통일에 대비해 민족의 단일성 유지가 필요함을 들어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국가 승인은 거부하였다(1970년 1월 14일 “민족상황에 관한 보고”에서 민족의 동질성 유지를 재차 강조).
동독의 울브리히트 제 1서기는 1970년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여전히 독일 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주장은 허구이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그리고 독점재벌과 노동자 사이에 하나의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응수하며 동독을 사회주의 독일 민족(sozialistischer deutscher Nationalstaat)이라고 주장하였다.
1971년 5월 새로 당서기장이 된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는 1971년 6월 제 8차 당대회에서, “부르주아 민족이 존속하고 있고 민족문제가 부르주아와 노동자 대중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계급모순을 통해 결정되는 서독과 달리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독일국가, 사회주의 민족이 발전되었다”고 밝혔다.
동독은 두 민족론에 대한 내부적 조치를 실행하였다. 1974년 10월의 개정 헌법에서 1968년 헌법 1조의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조항을 “독일민주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조항으로 대체하였고 이전 헌법의 “통일 및 민족”이라는 단어를 모두 삭제하였다. 공식적 언어 사용에서 “Deutsche”와 “Deutschland”라는 단어를 지우고자 하였으며, ‘독일방송(Deutschlandsender)’은 1971년에 ‘동독의 목소리(Stimme der DDR)’로, ‘독일학술원(Deutsche AdW)’은 1972년 이후 ‘동독학술원(Akademie der Wissenschaften der DDR)’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우표 발행에서도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에서 ‘Deutsche’가 드러난다는 이유로 ‘DDR’이라는 약칭을 사용하였고, 동독 애국가에 요하네스 베허(J. Becher)가 쓴 가사가 1974년 이래 불려지거나 출판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는 금지된 애국가의 가사, 즉 “독일, 하나의 조국(Deutschland einig Vaterland)”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2) 동독의 두 민족 두 국가론(Das Zwei-Nationen-Konzept)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의 배경
동독은 1958년부터 생활 수준에 있어 서독에 뒤떨어지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점점 더 격차가 커져가고 있었다. 이는 동독이 체제경쟁에서 서독에 패한 것을 의미하며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서독에 의한 통일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969년 집권한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는 성명에서 ‘독일에 사실상 두 개의 국가가 있다’고 함으로써(그러나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승인은 거부하고 양독간 특수관계 입장을 유지) 서독의 단독대표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동서독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체결에 이어 19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 이로 인해 동독은 두 국가론과 별개로 통일문제와 결부된 민족 개념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통일이 불가할 뿐 아니라 단일 독일 민족의 지속에도 문제를 제기하며 급진적으로 두 민족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동독의 ‘두 국가 두 민족론’은 내부에서 나타난 새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동독 주민의 다수가 동독의 사회와 국가에 대해 동일시하였다. 이와 관련 동독 사통당은 사회주의 애국주의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동독-민족의식을 정당성의 수단으로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사회주의 민족, 사회주의 조국, 사회주의 고향 혹은 우리의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통해 동독 주민에게 독자적인 정체성 형성을 시도한 것이다.
4. 평가 및 시사점
동독은 분단 초기 통일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 통일논의를 주도하기 위해 1민족 1국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독에 비해 상대적 국력이 떨어짐이 확연해지고 체제 위기가 부각되면서 1민족 2국가를 주장하고 이어 2민족 2국가를 제기하였다. 북한도 비숫한 경로를 보여오고 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초기 50-60년대는 남한보다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 통일 공세를 펴고 ‘하나의 조선’을 강조하였다. 그러다 80년대 이후 국력이 역전되면서 통일논의에 적극적이던 태도를 전환하여 소극적 태도를 보여왔다.
동독과 북한의 다른 점은 북한이 제기한 ‘두 국가론’을 수식하는 용어에 있다. ‘적대적, 교전국‘이라는 군사적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수사는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의 차이점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아울러, 동독체제와 북한체제의 개방 정도와 핵 보유 여부, 내부 체제의 기강 등도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서독은 동독의 2민족 2국가론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서독은 일관되게 1민족 1국가 입장을 견지하였다. 브란트 정부 당시 동독의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하고 공식적으로 2국가를 지지했지만 시종일관 동서독 관계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닌 특수관계‘임을 내세웠다. 동독은 1974년 10월 헌법 1조 개정을 통해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를 “독일민주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조항으로 대체하였고 기존 헌법의 “통일 및 민족”을 삭제하였으며, 16년이 지난 1989년 내부 민중혁명이 촉발되고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통일 선언으로 연결되었다.
지금까지 북한과 동독의 두 국가론의 내용과 역사적 배경을 검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북한의 두 국가론에 장기적 안목에서 차분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독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력이 약한 분단국의 일방 당사자는 생존 차원에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전략적 선택을 하는 것이며, 서독의 대응 사례에서 보듯이 남한은 국력 우위를 바탕으로 북한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남북 관계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일관된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통일과 평화는 자칫 역상관관계로 작용한다. 북한의 체제위기감이 커진 상황에서 통일을 강조하기보다 우선은 평화를 중시하면서 궁지에 처한 북한에 군사도발의 빌미를 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셋째, 북한의 두 국가론이 동독의 그것과 다른 점이 ‘적대적, 교전국’이라는 수사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사실상 보유하고 있고 한반도에 배치된 무력 체계는 세계에서 높은 수준이다. 국민들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고 돌발 상황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내부 대응체제를 점검하고 동맹국간 긴밀한 협조체계를 가동하며 북한과 중-러에 대해서도 오판하지 않도록 적극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넷째, 정부는 북한의 상황과 남북관계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 상황을 공유하고 내부 갈등이 확산되지 않도록 관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 체제의 비정상성이 심화되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는 시점에서 섣부르게 북한을 자극하기보다 북한이 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정책 기조가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우리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조하고 정밀하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